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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태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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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무제는 북위의 세 번째 황제로서, 화북을 통일하고 북위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킨 인물이다. 그는 호하, 북연, 북량 등을 멸망시키고 서역 국가들의 조공을 받으며 5호 16국 시대를 종식시켰다. 내정에서는 한족화 정책을 추진하고 도교를 장려하며, 불교를 탄압하는 등 복합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급진적인 한족화 정책과 폐불 정책은 선비족과 불교계의 반발을 샀으며, 말년에는 환관의 참언으로 인해 암살당했다. 그의 치세는 북위의 강성함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내부적인 갈등과 혼란을 야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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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52년 사망 - 탁발여
    탁발여는 북위 태무제의 아들로, 환관 종애의 옹립으로 황제가 되었으나 종애에게 살해당하고 사후 문성제에 의해 왕의 예로 장례가 치러졌다.
북위 태무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탁발도(拓跋燾)
불리(佛狸)
묘호세조(世祖)
시호태무황제(太武皇帝)
가족 성탁발(Tuòbá)
출생408년
사망452년 3월 11일
매장지운중 금릉(雲中金陵)
종교도교
재위 정보
즉위423년 12월 27일
퇴위452년 3월 11일
연호시광(始光) 424년–428년
신가(神䴥) 428년–431년
연화(延和) 432년–434년
태연(太延) 435년–440년
태평진군(太平真君) 440년–451년
정평(正平) 451년–452년
가계
아버지명원제(明元帝)
어머니밀황후(密皇后) 두씨(杜氏)
배우자태무황후(太武皇后) 혁련씨(赫連氏)
경애황후(敬哀皇后) 하씨(賀氏)
노좌소의(Lu Zuo Zhaoyi)
자녀탁발황(Tuoba Huang)
탁발복락(Tuoba Fuluo)
탁발한(Tuoba Han)
탁발탄(Tuoba Tan)
탁발건(Tuoba Jian)
탁발여(Tuoba Yu)
상곡공주(Princess Shanggu)
기타 정보
이전 군주명원제(明元帝)
계승 군주탁발여(Tuoba Yu)

2. 생애

태무제는 호하, 북연, 북량을 차례로 멸망시켜 439년에 화북을 통일하였다. 서역에서 조공을 바쳐오는 나라만 해도 20여개국에 이르니 북위의 국력은 크게 강성해졌고 이때부터 중국은 남북조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태무제는 내정을 정비하면서 남조 유송에 대한 공격을 개시해 회남과 강북을 빼앗았다. 이때 도사 구겸지가 북위에서 도교를 확립하고 한족 출신 관료 최호와 손을 잡아 태무제에게 진언하여 폐불을 단행하게 하였다.(삼무일종의 폐불 첫 번째)[13] 이 시기에 선비족의 한족화와 도시 귀족화가 진행되면서 서서히 북위 내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또한 최호는 한족 출신 관료를 다수 등용하여 한족화를 추진하였으나, 급진적이고 강제적인 한족화로 인해 선비족들의 반발을 받았으며 역사서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태무제를 직설적으로 평가한 것 때문에 450년에 많은 한족 출신 관료들과 함께 태무제에게 숙청•처형당했다. 이로부터 북위의 한족화는 한족이 아닌 선비족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용장엄혹(勇壯嚴酷)하다는 태무제 역시 452년에 환관에게 독살당했다.

이후 4대 문성제의 황후이자 5대 헌문제의 적모인 문명태후가 혼란을 수습하고 466년 헌문제를 옹립해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436년에는 요하 유역을 지배하고 있던 풍씨의 북연을 멸망시키고,[13] 439년에는 고장에 근거지를 둔 흉노 저거부가 건국한 북량을 멸망시켰다.[13] 이 동서 양면에서의 활약으로 화북 통일에 성공하여, 오호 십육국 시대를 종언시켰다.[13] 그 후, 내몽골의 북변 방비를 위해 6곳의 진(육진의 난)을 중심으로 한 둔전 지대를 설치했다.

444년, 한인 재상인 최호와 신봉하던 신천사도의 개조인 도사 구겸지의 진언에 따라서인지, 널리 인사에 대해 승려나 사무(師巫)를 기르는 것을 금지하는 조서를 내렸다.[13] 이어서 446년, 개오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장안으로 향했을 때, 장안의 사찰에서 대량의 무기가 발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폐불 조서를 발포하고, 사찰과 불상을 파괴하고, 사문(沙門)은 갱살에 처했다(삼무일종의 폐불의 제1).[13] 이 폐불에 대해서는, 북량의 멸망을 계기로 서역 무역을 국가의 손으로 장악하려는 태무제와, 이에 반발하는 상인 및 그들에게 신앙되고 보호받던 불교 사찰과의 대립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13]

450년, 100만이라고 칭한 대군을 이끌고 남정을 시작했다. 남조 송은 대패했고, 전사자는 만 단위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북위군은 과보까지 진군했지만, 장강을 건너지 않고 도읍인 평성으로 돌아갔다. 포로가 된 송 백성 5만여 호는 기내(畿內)에 분배되었다. 남조 송은 최성기인 원가의 태평 시대(424년 - 452년)를 구가하고 있었지만, 강북(장강의 북쪽)의 땅을 잿더미로 만들었고, 이를 경계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내정에서는, 재상 최호를 중심으로 한족의 제후를 중용했다. 그러나, 최호 등의 성급한 한화 정책과, 남조를 본뜬 귀족제의 채택에 반발하여, 국사 편찬상의 문제를 구실로, 450년에는 최호를 족벌했다.

451년, 환관 종애의 참언으로, 결과적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던 황태자 탁발황이 충격으로 병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단죄를 두려워한 종애에 의해, 452년에 태무제가 살해되었다. 종애는 황제의 막내아들 남안왕 탁발여를 옹립했지만, 곧 종애의 횡포에 혐오감을 느낀 황제의 남안왕은 종애를 주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신변의 위험을 느낀 종애는 선수를 쳐서 남안왕을 살해했다. 그 모습을 본 상서의 육려 · 우림랑중(근위대장)의 유니 · 전중상서의 원하(독발파강) 등이 종애를 재빨리 주살하고, 망태자의 적자인 문성제(탁발준)를 즉위시켰다.

즉위 초에는 북방의 고대 몽골족으로 보이는 유연에 대한 대책에 중점을 두고, 425년에 이를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13] 이어서 화북 통일을 꾀하여, 흉노 혁련부의 유씨가 건국한 를 공격하여 장안을 함락시키고, 427년에는 도읍인 통만성을 함락시켜 하를 멸망시켰다.[13]

2. 1. 초기 생애

408년, 북위 명원제 탁발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8]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용감하여 할아버지인 도무제의 총애를 받았다.[8] 탁발도는 어릴 때 풀리(Foli)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알 수 없는 이유로 어린 나이에 어머니인 두귀빈과 헤어져 유모인 두씨 부인에게 길러졌다.[8] 탁발도는 어머니의 상황을 알게 되자 매우 슬퍼했고, 이는 그의 아버지 명원제의 칭찬을 받았다.[8] 420년에 두귀빈이 사망했다.[8]

422년, 명원제가 병에 걸리자, 최호의 제안에 따라 탁발도는 황태자로 책봉되었고, 부황제(副皇帝)로서 국정을 담당했다.[8] 명원제는 발발숭(拔拔嵩), 최호, 달해근(達奚斤), 안지동(安遲同), 구목릉관(丘穆陵觀), 그리고 구돈퇴(丘敦堆)를 황태자의 보좌관으로 임명했다.[8] 이때부터 국내 문제를 비롯한 대부분의 문제는 황태자인 탁발도가 결정하고, 명원제는 중요한 문제만 결정했다.[8] 그해 말, 명원제가 경쟁국인 유송을 상대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을 때, 탁발도는 북쪽으로 가서 유연의 공격을 방어했다.[8] 423년, 명원제가 사망하자 탁발도는 태무제로 즉위했다.[8]

2. 2. 화북 통일과 북위의 팽창

태무제는 즉위 초부터 적극적인 정복 전쟁을 추진했다. 426년, 하를 공격하여 장안을 함락시키고, 427년에는 수도 통만성을 함락시켜 하를 멸망시켰다. 436년에는 요하 유역을 지배하던 북연을 멸망시켰고, 439년에는 고장에 근거지를 둔 북량을 멸망시켰다. 이러한 정복 전쟁을 통해 화북을 통일하고 오호십육국 시대를 종식시켰다.

태무제는 북방의 유연에 대한 대책에도 힘을 기울였다. 425년에 유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후에도 유연을 여러 차례 공격하여 북위의 북방 국경을 안정시켰다.

태무제는 서역 국가들과도 교류하여 20여 개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태무제는 하 정벌에서 승리한뒤, 역사가 사마광은 그의 ''자치통감''에서 태무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논평을 했다.

방패를 든 북위 병사 조각상

2. 3. 내정 정비와 한족화 정책

태무제는 내정을 정비하면서 남조 유송에 대한 공격을 개시해 회남과 강북을 빼앗았다. 이때 도사 구겸지가 북위에서 도교를 확립하고 한족 출신 관료 최호와 손을 잡아 태무제에게 진언하여 폐불을 단행하게 하였다.(삼무일종의 폐불 첫 번째) 이 시기에 선비족의 한족화와 도시 귀족화가 진행되면서 서서히 북위 내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태무제는 즉위 직후 독실한 도교 신자가 되었으며, 이때 도교 신자인 구겸지가 명성을 얻었다. 최호는 구겸지의 추종자가 되어 태무제 앞에서 구겸지를 자주 칭찬했다. 태무제는 구겸지가 자신이 신성한 존재임을 암시하는 예언을 내놓자 기뻐했고, 공식적으로 구겸지의 포교를 지지했다.

최호는 한족 출신 관료를 다수 등용하여 한족화를 추진하였으나, 급진적이고 강제적인 한족화로 인해 선비족들의 반발을 받았다. 역사서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태무제를 직설적으로 평가한 것 때문에 450년에 많은 한족 출신 관료들과 함께 태무제에게 숙청•처형당했다. 이로부터 북위의 한족화는 한족이 아닌 선비족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426년, 환관 추낙제(仇洛齊)의 상소를 받은 후, 태무제는 호적 개혁을 시행했다. 이전에는 도무제가 비등록 가구를 찾아내기 위해 그들에게 비단을 보냈고, 이 가구들이 호응했지만, 지방 세무 관리들의 등록부에 제대로 배정되지 않았다. 그 결과, 북위는 충분한 납세 인구를 확보하지 못해 세금을 내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들에게 더 큰 부담을 주었다. 태무제는 비등록 가구를 지방 세무 등록부에 적절하게 배정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다.

431년 말, 태무제는 최호에게 398-9년 도무제 통치 이후 주요 개정이 없었던 북위 법전을 개정하도록 지시했다. 새로운 법전은 이전 법전보다 관대해 보였으며, 4년 및 5년 징역형을 1년형으로 대체하고, 관리들이 처벌을 받는 대신 계급 강등을 허용했다. 그러나 이 시점부터 관리들은 재물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만연한 부패로 유명해졌다.

태무제는 이러한 원정에 참여한 병사들에게 10년간의 세금 및 공역 면제를 부여했다. 그는 또한 정복한 하 백성들에게 그들을 달래기 위해 7년간의 세금 및 공역 면제를 부여했다. 이것들은 태무제가 빈번한 전쟁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내린 일련의 사면 및 세금 면제의 일부였지만, 그의 통치 말까지 이러한 면제는 제한적인 효과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 4. 삼무일종의 폐불 (첫 번째)

태무제는 도사 구겸지를 신임하여 그를 국사(國師)로 삼고, 도교를 국교로 삼았다.[9] 구겸지는 최호와 손을 잡고 태무제에게 불교를 탄압할 것을 진언하였다.[9][10]

444년, 태무제는 승려나 사무(師巫)를 사사로이 기르는 것을 금지하는 조서를 내렸다.[13] 446년, 개오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장안으로 향했을 때, 장안의 사찰에서 대량의 무기가 발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13] 태무제는 이를 불교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 증거로 간주하고, 폐불 조서를 발포하여 사찰과 불상을 파괴하고 승려들을 갱살(坑殺)에 처했다.[13] 이는 삼무일종의 폐불 중 첫 번째 사건이다. 최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제국 전역의 모든 승려들을 학살하고 사찰, 불상, 경전을 파괴하도록 부추겼고, 구겸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무제는 장안의 승려들을 학살하고, 불상을 파괴하고, 경전을 불태웠다.[13] 그는 이어 제국 전역에 불교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황태자 황은 칙령을 반포하는 데 지연 전술을 사용하여 불교도들이 도망치거나 숨을 수 있도록 했지만, 북위에는 단 하나의 불교 사찰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한다.[13]

이러한 폐불 사건은 불교계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사회적 반발을 야기했다. 일설에는 북량 멸망을 계기로 서역 무역을 국가가 장악하려 하자, 이에 반발하는 상인 및 그들에게 신앙되고 보호받던 불교 사찰과의 대립이 폐불의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13]

2. 5. 최호의 숙청과 죽음

태무제는 최호를 등용하여 한족화를 추진했으나, 급진적인 정책은 선비족의 반발을 샀다. 450년, 최호는 역사서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태무제를 직설적으로 평가하고 북위의 역사를 지나치게 상세히 기록했다는 이유로 숙청당했다. 이 사건은 한족 관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후 북위의 한족화 정책은 선비족 주도로 전환되었다. 최호는 너무 두려워서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고 묘사되었는데,이는 최호의 성격과 매우 일치하지 않으며, 최호가 스스로 독살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최호를 처형한 직후 태무제는 그렇게 한 것에 대해 후회를 표명했다.

451년, 환관 종애의 참언으로 황태자 탁발황이 충격으로 병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452년, 종애는 태무제를 살해하고, 황제의 막내아들 남안왕 탁발여를 옹립했으나, 탁발여 역시 종애에게 살해당했다. 결국 상서 육려(陸麗) 등이 종애를 주살하고 탁발황의 아들 탁발준을 즉위시켰다.

3. 남조와의 관계

태무제는 남조(南朝)의 유송과 대립했다. 430년, 유송이 북벌을 감행하자, 태무제는 황하 이남의 북위 영토를 포기하고 유송군을 유인한 후, 겨울에 반격을 가하여 낙양과 호뢰(虎牢)를 탈환했다.

450년, 태무제는 유송의 문제(文帝)가 개무(蓋吳)의 반란을 조장했다고 비난하며 유송을 공격했다. 태무제는 100만 대군을 이끌고 남정을 시작하여 유송에 큰 타격을 입혔다. 북위군은 팽성으로 진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남쪽으로 계속 진격하여 양쯔강을 건너 유송의 수도 건강을 파괴하겠다고 주장했다. 북위군은 대규모 학살과 방화를 자행하여 유송의 회수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451년 새해 즈음, 태무제는 건강에서 강을 건너 있는 과보(瓜步)까지 진군했으나, 장강(長江)을 건너지 않고 평성(平城)으로 돌아갔다. 그는 이전에 제안했던 혼인 평화 제안을 다시 제시했는데, 문제(文帝)가 자신의 손자 중 한 명과 딸을 결혼시키면, 그는 유준(당시 팽성을 방어하고 있던 유준)과 딸을 결혼시켜 장기적인 평화를 구축할 의향이 있었다. 유소(劉劭) 황태자는 그 제안을 지지했지만, 강담(江湛)은 반대했고, 혼인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451년 봄, 태무제는 자신의 군대가 과도하게 확장되어 팽성과 수양에 주둔한 유송군에게 후방에서 공격받을 것을 우려하여 철수를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유송 장군 장질에게 모욕을 받아, 그는 욱이(盱眙, 현대 장쑤성 화이안)를 포위했고, 양측이 큰 피해를 입었지만 방어가 유지되자 신속하게 철수했다. 이 원정으로 두 제국 모두 큰 타격을 입었으며, 태무제의 잔혹한 면모가 잘 드러났다. 사마광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위군은 남연, 서, 북연, 유, 청, 기 주를 황폐화시켰다. 송의 사망자와 부상자는 헤아릴 수 없었다. 위군이 송나라 젊은이들을 만나면, 그들은 즉시 그들의 머리를 베거나 반으로 잘랐다. 유아들은 창으로 관통되었고, 창은 흔들려서 유아들이 돌면서 비명을 지르며 놀았다. 위군이 지나간 군과 현은 불타고 학살되었고, 풀 한 포기도 남지 않았다. 참새들이 봄에 돌아왔을 때, 그들은 둥지를 지을 집을 찾을 수 없었고, 그래서 숲에서 그렇게 해야 했다. 위나라 군인과 말도 절반 이상 사상자를 냈고, 선비족은 모두 불평했다.''

태무제는 전쟁 중에도 데탕트의 공식적인 의례를 유지했다. 예를 들어, 팽성 밖에 있었을 때, 유준에게 와인과 사탕수수를 공급해 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유준에게 낙타, 노새, 코트를 선물했다. 나중에 그는 유준에게 오렌지와 도박 용품을 요청하는 한편, 유준에게 담요, 소금, 절인 콩을 제공했다. 과보에 있을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고, 그는 문제(文帝)에게 선물을 요청하고 보냈다.

4. 가계


  • 황후 : 태무황후 혁련씨(太武皇后 赫連氏, ?~453)
  • 황후(추존) : 경애황후 하씨(敬哀皇后 賀氏, ?~428)
  • * 제1황자 : 경목태자 탁발황(景穆太子 拓跋晃, 428~451) - (경목제로 추숭)
  • 후궁 : 좌소의 풍씨(左昭儀 馮氏)
  • 후궁 : 좌소의 여씨(左昭儀 閭氏)
  • * 제6황자 : 남안은왕 탁발여(南安隱王 拓跋余, ?~452)
  • 후궁 : 우소의 저거씨(右昭儀 沮渠氏, ?~447)
  • 후궁 : 부인 욱구려씨(夫人 郁久閭氏)
  • 후궁 : 귀인 혁련씨(貴人 赫連氏) - 황후의 동생
  • 후궁 : 귀인 혁련씨(貴人 赫連氏) - 황후의 동생
  • 후궁 : 초방 월씨(椒房 越氏)
  • * 제2황자 : 진왕 탁발복라(晉王 拓跋伏羅, ?~447)
  • 후궁 : 초방 서씨(椒房 舒氏)
  • * 제3황자 : 동평왕 탁발한(東平王 拓跋翰, ?~452)
  • 후궁 : 초방 불씨(椒房 弗氏)
  • * 제4황자 : 임회선왕 탁발담(臨淮宣王 拓跋譚, ?~452)
  • 후궁 : 초방 복씨(椒房 伏氏)
  • * 제5황자 : 광양간왕 탁발건(廣陽簡王 拓跋建, ?~452)
  • 불명
  • * ''탁발소아''
  • * ''탁발묘아''
  • * ''탁발진''
  • * ''탁발호두''
  • * ''탁발룡두''
  • * 상곡 공주
  • ** 하남 의귀(乙瑰)에게 시집가서 자녀(아들 하나)를 낳음.

4. 1. 황후

태무황후 혁련씨(太武皇后 赫連氏, ?~453)는 혁련발발의 딸이다. 경애황후 하씨(敬哀皇后 賀氏, ?~428)는 탁발황의 생모로, 문성제에 의해 태무경애황후로 추존되었다.

좌소의 풍씨(풍좌소의/馮左昭儀중국어)는 풍홍의 딸이자 문성문명황후(풍태후)의 숙모이다. 이외에도 좌소의 여씨(左昭儀 閭氏), 우소의 저거씨(右昭儀 沮渠氏, ?~447), 부인 욱구려씨(夫人 郁久閭氏), 귀인 혁련씨(貴人 赫連氏, 황후의 동생), 초방 월씨(椒房 越氏), 초방 서씨(椒房 舒氏), 초방 불씨(椒房 弗氏), 초방 복씨(椒房 伏氏) 등의 후궁이 있었다.

4. 2. 후궁

태무황후 혁련씨(太武皇后 赫連氏, ?~453)는 혁련발발의 딸이다. 경애황후 하씨(敬哀皇后 賀氏, ?~428)는 제1황자 경목태자 탁발황(428~451)을 낳았다. 탁발황은 경목제로 추숭되었다.

좌소의 여씨(左昭儀 閭氏)는 제6황자 남안은왕 탁발여(?~452)를 낳았다. 초방 월씨(椒房 越氏)는 제2황자 진왕 탁발복라(?~447)를 낳았고, 초방 서씨(椒房 舒氏)는 제3황자 동평왕 탁발한(?~452)을 낳았다. 초방 불씨(椒房 弗氏)는 제4황자 임회선왕 탁발담(?~452)을 낳았고, 초방 복씨(椒房 伏氏)는 제5황자 광양간왕 탁발건(?~452)을 낳았다.

이외에도 우소의 저거씨(右昭儀 沮渠氏, ?~447), 부인 욱구려씨(夫人 郁久閭氏), 귀인 혁련씨(貴人 赫連氏) - 황후의 동생, 귀인 혁련씨(貴人 赫連氏) - 황후의 동생,좌소의 풍씨(左昭儀 馮氏) - 풍홍의 딸., 소의 거거씨 (북량의 흥평공주), 부인 맹유희[14]등이 있었다.

자녀로는 탁발소아(拓跋小兒), 탁발묘아(拓跋貓兒), 탁발진(拓跋真), 탁발호두(拓跋虎頭), 탁발룡두(拓跋龍頭), 상곡 공주(上谷公主)가 있었다. 상곡 공주는 하남 의귀(乙瑰)에게 시집가서 아들 하나를 낳았다.

4. 3. 황자

북위 태무제에게는 여러 황자와 공주가 있었다. 태무황후 혁련씨와 경애황후 하씨, 그리고 여러 후궁들이 있었다. 경애황후 하씨는 제1황자인 경목태자 탁발황을 낳았다. 탁발황은 훗날 아들 문성제에 의해 경목제로 추존되었다. 좌소의 여씨는 제6황자인 남안은왕 탁발여를 낳았다. 초방 월씨는 제2황자 진왕 탁발복라를, 초방 서씨는 제3황자 동평왕 탁발한을, 초방 불씨는 제4황자 임회선왕 탁발담을, 초방 복씨는 제5황자 광양간왕 탁발건을 낳았다. 이 외에도 탁발소아, 탁발묘아, 탁발진, 탁발호두, 탁발용두 등의 황자와 상곡 공주가 있었다. 상곡 공주는 하남 의귀에게 시집가서 아들 하나를 낳았다.

4. 4. 황녀

태무제의 황녀에 대한 기록은 상세하지 않다. 상곡공주(上谷公主)는 하남(河南) 의귀(乙瑰)에게 시집가서 아들 하나를 낳았다. 그 외에 탁발소아(拓跋小兒), 탁발묘아(拓跋貓兒), 탁발진(拓跋真), 탁발호두(拓跋虎頭), 탁발용두(拓跋龍頭) 등의 황녀가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5. 평가

참조

[1] 간행물 5th year of the Tianci era, per Emperor Taiwu's biography in Book of Wei
[2] 간행물 jiayin day of the 2nd month of the 29th year of the Yuanjia era
[3] 간행물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4] 간행물 renshen day of the 11th month of the 1st year of the Jingping era
[5] 간행물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6] 간행물 佛貍 should actually be pronounced Büri, and meant "wolf" in the Xianbei language, 罗新:《北魏太武帝的鲜卑本名》,《民族研究》,2006年第4期。
[7] 서적 The Empire of the Steppes https://archive.org/[...] Rutgers University Press
[8] 간행물 Book of Wei volume 4. "帝生不逮密太后,及有所識,言則悲慟,哀感傍人,太宗聞而嘉歎。"
[9] 서적 Early Chinese Religion: The Period of Division (220-589 Ad) https://books.google[...] BRILL 2009-10-30
[10] 서적 Early Chinese Religion: The Period of Division (220-589 Ad) https://books.google[...] BRILL 2009-10-30
[11] 서적 Early Chinese Religion: The Period of Division (220-589 Ad) https://books.google[...] BRILL 2009-10-30
[12] 서적 Early Chinese Religion: The Period of Division (220-589 Ad) https://books.google[...] BRILL 2009-10-30
[13] 서적 両税法成立史の研究 雄山閣
[14] 문서 『漢魏晋南北朝墓志彙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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